모든 고등학교 졸업 이후 취직한 "고졸 프로그래머"가 다 그러는지 몰라도 대학생, 특히 캠퍼스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나 보다. 난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친구들도 하나둘 대학에 가 방학에 하루종일 노는걸 보고는 저거 하나만큼은 부럽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그렇게 막 쉬고 놀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한지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경력 5년차를 넘어섰지만 마음놓고 편하게 쉬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취미가 돈벌이가 되고 나서 취미와 일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해야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지는 꽤 됐다. 이러한 걱정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여가시간에 보낼 수 있는 취미가 게임, 프로그래밍 말고는 없다보니 이게 쉬는건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런걸 의식해본 적이 없었는데.
서버 직종 프로그래머에게는 완전한 휴식이란게 없다. 반쯤 과장된 소문이지만, 라이브 서비스의 서버가 터졌을 때 내가 봐야한다고 생각하면 여가시간도 마냥 자유로운 시간처럼은 느껴지지 않는다. 업무에 손이 비는 날이라도 딱히 쉰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몰라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나는 오늘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날도 한번도 쉰 적이 없던 실제론 바쁜 날들이 대부분이었고 늘어가는 책임감의 압박감은 점점 심해졌다. 모든걸 내려놓고 싶었고 취미=일의 프로그래밍이 나에게서 멀어지면 어쩌나 싶어 불안감이 커졌다.
번아웃?
지금까지 나에게 총 두번의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내가 제대로 하는게 맞나 싶었던 입사 3개월 차에 코드 한줄을 읽으면 다음 한줄을 읽는데 30분이 걸렷던 첫 번아웃은 정말로 무서웠었다. 흔히 대학에서 배운다는 프로젝트의 책임감 같은게 없었던 나에게는 업무로써 일을 완성도있게 진행하는 것이 뭔지 전혀 몰랐었고, 내가 뭘 해야하는지 특히 뭘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고.. 다행히 졸라게 발전해버린 현대 의학으로 잘 해결이 됐었다. 두번째 번아웃은 이틀에 게임 하나를 만들던 시절 개발 자체가 너무 재미가 없어져서 도저히 일을 진행하지 못하는 상태가 왔었다. 취미와 일이 같은 사람에게 그거 하나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한다는 건 앞으로 내가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로 다가온다. 다행히 이때도 일주일 쉬고 일과 취미를 분리하자는 마음가짐 이후로 다시 일과 취미 모두 재밌어졌고 그리 오래간 걱정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좀 달랐다. 내가 앞으로 뭘 하든 잘할거라는 근자감이 있었고 내 앞길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이 일도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팀이 축소되고 내가 서비스에 바라는 욕구가 많아 손을 대거나 일을 벌려 주도권과 책임감을 가지게 된 일이 많아졌고 나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되는 사람도 많아졌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일의 주인"은 더이상 시키면 일을 하면 되는 서버 개발자 나부랭이가 아니게 된다. 나에게 들어오는 스트레스와 압박은 나도 모르게 커져갔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하게 되고 모든걸 내려놓고 싶다고 자주 생각하게 되는게 이번에 겪은 세번째 번아웃인 것 같다. 정확히는 번아웃이 오기 전 잘 대처를 했다는 느낌?
모든걸 내려놓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솔직히 많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일을 내려놓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쉬고 싶었던 것 같다. 난 내 서비스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렇기에 욕심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았는데 적당히를 모른다고 해야할지 아직 감당할 수 있는 일의 스케일이 작은데 너무 빠르게 손만 커졌던 건지 내가 견뎌낼 수 있는 용량은 진작에 초과했었던 것 같다. 집에 오면 개인 프로젝트할 기력도 없어서 1년정도 개인 프로젝트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었다. 커뮤니케이션을 내려놓으면 스트레스가 덜하지 않을까 해서 꽤 오랜기간 재택근무도 해봤지만 크게 좋아지지는 않았고.. 결국 주변분들의 조언도 듣고 휴직을 결정했다. 이 글을 작성하는 오늘은 휴직 기간 총 두달이 거의 다 지나고 일주일정도 남은 날인데, 근 두달동안 뭘 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놀고먹으면서 느낀 회고 정도에 가까울 것 같다.
첫 휴식?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일을 했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쉬어봤다. 첫 일주일동안은 내가 뭘 해야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슬랙을 지우기로 팀장님과 약속했지만 간간히 들어와 일은 잘 되가는지 구경도 자주 했고 막상 게임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밖에 나가 놀면서 자유의 몸에 적응해갔다. 사람은 빨리 적응한다더니 일주일만에 밤낮이 바꼈다. 평소 수면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나에게 언제든 낮잠을 자고 밤을 새도 된다는 압박감이 없는건 너무 짜릿했다. 이후 일주일 전까지의 기간동안의 기억은 전혀 없다. 여자친구랑 많이 놀러다니고 게임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그게 다였다. 좋아했는데 못봤던 영화도 잔뜩 봤고 거의 1년 넘게 못했던 프로젝트들도 좀 손을 댔었다. 주로 친구들과 놀면서 필요했던 것들이고 작긴 했지만 밖에 나가지 않은 날에는 에너지가 넘쳐나 의욕이 불탔던 것 같다. 게임 비스무리한 것도 만들고 싶어서 잠깐 진행하기도 했었다. 꽤 귀엽다
이직?
휴직 기간 전부터 이직 생각을 아예 안한건 아니다. 휴직하고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괴담이 좀 있는데 나도 아예 떠날 생각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내가 지금 서비스를 너무 사랑하나 싶다. 이직할 생각은 없어도 찔러보는 것도 좋다고는 하던데 솔직히 너무 귀찮았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서 굳이 싶었고.. 지금 내 상태에 대해 만족한다거나 부족함을 못느끼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다. 이런말 어떤 사람들이 들으면 왜 굳이 그러냐고 많이 열받아하겠지
앞으로?
일주일 뒤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하고 싶었던 거라던가 못했던 것들을 좀 힘내서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과 일상의 분리는 여전히 힘들겠고 내 업종 특성상 아마 잘 안될테지만 그럴 생각도 딱히 없고 그게 싫지도 않다. 내게 이번에 필요했던건 충분한 휴식을 통한 에너지 충전이었고.. 이번에도 충분히 잘한 번아웃 대처였다고 본다. 이제 정말 멋진 회사인이 되가는게 아닐까?
ps
유급휴직 안식일 그런거 없나요 대표님?